티스토리 뷰

반응형

어떤 영화들은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우리의 심장에 깊숙이 새겨지는 이미지와 감정을 남깁니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바로 그런 영화입니다.

 

영화 &lt;타오르는 여인의 초상&gt;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개봉 당시부터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뜨거운 찬사를 받으며 '인생 영화'로 꼽는 사람들이 많았던 이 작품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그 가치가 빛을 발하는 듯합니다. 처음 이 영화를 마주했을 때 느꼈던 경이로움, 그리고 이후에도 머릿속을 맴도는 잔상들은 이 영화가 얼마나 특별한지를 증명합니다.

 

배경은 18세기 프랑스의 외딴섬. 화가 마리안느는 백작 부인으로부터 딸 엘로이즈의 결혼 초상화를 의뢰받습니다. 결혼하기 싫어하는 엘로이즈는 초상화 그리는 것을 거부하고, 결국 마리안느는 정체를 숨긴 채 엘로이즈의 말동무인 척하며 그녀를 몰래 관찰해 그림을 완성해야 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이 설정 자체가 흥미롭죠. 누군가를 그린다는 행위가 그저 대상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 상대방의 눈빛, 표정, 움직임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읽어내고 이해하려는 깊은 시도로 바뀝니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마리안느의 시선은 엘로이즈를 향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관찰자의 시선이 아닙니다. 함께 산책하고, 대화하고, 침묵을 공유하며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라는 인물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기 시작합니다. 엘로이즈 역시 처음에는 닫혀 있던 마음을 서서히 열고 마리안느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하죠. 이 과정에서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나를 그리는 게 아니라, 나를 관찰하는 거예요."

 

이 한 마디는 두 사람 관계의 시작을 정확히 꿰뚫습니다. 마리안느의 시선은 그저 대상을 담는 것을 넘어, 상대방을 '알아가는' 과정이 됩니다. 그리고 마리안느의 예리한 관찰력은 엘로이즈의 작은 습관까지 포착하죠.

"놀라면 눈을 깜빡여요."

 

이러한 사소한 발견들은 그림의 디테일을 더할 뿐만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 친밀감을 쌓아 올리는 벽돌이 됩니다.

 

 

영화는 이 두 여인의 관계가 발전하는 과정을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미장센과 절제된 연출로 따라갑니다. 대사는 많지 않지만, 인물들의 눈빛과 표정, 손짓 하나하나가 강력한 언어가 됩니다. 특히 두 주인공의 '시선' 교환은 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관찰하며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일방적인 시선에서 시작하지만, 관계가 깊어지면서 엘로이즈 역시 마리안느를 바라보고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시선은 서로에게 향하며 상호적인 것이 되고, 그 과정에서 깊은 교감과 사랑이 싹트입니다. 서로를 '본다는' 행위는 이 영화에서 가장 에로틱하고 진실된 순간들을 만들어냅니다. 상대방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고, 인정하고, 사랑하게 되는 과정인 셈이죠.

 

결국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의 그림 작업에 기꺼이 응하며,

"당신은 나의 동등한 상대예요."

 

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관계가 화가와 모델을 넘어선 동등하고 깊은 관계로 발전했음을 선언합니다.

 

영화는 또한 18세기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제약들을 섬세하게 보여줍니다. 엘로이즈는 원치 않는 결혼을 강요받고, 마리안느는 여성 화가로서 활동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두 여인이 외딴섬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잠시나마 누리는 자유,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사랑은 더욱 애틋하게 다가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들은 사회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온전히 서로에게 집중하고 진정한 자신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을 넘어, 억압된 환경 속에서 여성들이 서로를 통해 발견하고 지지하며 나아가는 연대의 의미까지 내포하는 듯합니다. 하녀 소피의 이야기가 곁가지로 등장하는 것 또한 이런 여성 서사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고독 속에서, 듣기만 했던 자유를 느꼈어요."

 

엘로이즈가 수녀원에서 느꼈던 고독 속의 자유는, 마리안느와 함께하는 이 외딴섬에서 비로소 현실이 됩니다. 그들은 이 고립된 공간에서 사회의 굴레를 잠시 잊고 서로의 존재 자체만으로 충만함을 느낍니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셀린 시아마 감독의 연출은 경이롭습니다. 자연광을 주로 사용한 영상미는 고전 회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도, 인물들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카메라는 지극히 현대적입니다. 파도 소리, 바람 소리, 붓 소리 등 배경음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배경 음악은 극히 절제하여 사용함으로써 중요한 순간의 감정을 극대화합니다. 특히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 3악장이 울려 퍼지는 마지막 장면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경험을 선사합니다. 침묵 속에 쌓아 올린 감정들이 그 한 곡의 음악과 함께 폭발하는 듯한 전율을 느끼게 하죠.

 

아델 에넬과 노에미 메를랑 두 배우의 연기 또한 압도적입니다. 세상과의 단절 속에 자신을 가두고 있던 엘로이즈의 불안과 욕망, 그리고 마리안느를 만나 비로소 해방되는 과정을 아델 에넬은 미묘한 표정 변화와 눈빛만으로 완벽하게 표현해 냅니다. 노에미 메를랑은 엘로이즈를 관찰하는 화가의 예민함과, 점차 깊어지는 사랑 앞에서 흔들리는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두 배우가 만들어내는 화학반응은 이 영화의 심장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들의 눈빛 교환, 손길, 그리고 함께 나누는 짧은 대화들 속에서 관객은 그들의 사랑을 고스란히 느끼게 됩니다.

 

 

영화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신화를 인용하며 이별의 불가피성을 암시합니다. 뒤돌아보는 시선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두며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오르페우스가 지하 세계에서 에우리디케를 데리고 나오다 약속을 어기고 뒤를 돌아본 순간, 그녀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이 비극적인 신화는 두 사람의 이별을 예고하는 듯하면서도,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이 신화에 대해 자신들만의 해석을 더합니다.

 

그들이 나누는 대사,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발명한 걸까, 아니면 그저 뒤돌아본 걸까? 그는 예술가의 선택을 한 거야."

 

그리고 이에 대한 엘로이즈의 대답,

"어쩌면 에우리디케가 뒤돌아보라고 말한 걸지도 모르죠."

 

이 교환은 단순한 해석을 넘어, 사랑하는 존재를 영원히 기억하려는 예술가의 욕망, 그리고 어쩌면 사라짐으로써 영원히 남고자 하는 사랑하는 사람의 선택까지 담아내는 듯합니다. 결국 마리안느가 마지막 순간 뒤돌아보는 것은 에우리디케를 잃는 오르페우스의 행동과 겹쳐지며 슬픔을 자아내지만, 동시에 엘로이즈가 선택한 기억의 형태로 영원히 마리안느에게 남게 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마리안느는 자신의 그림을 보며, 혹은 엘로이즈를 회상하며 말할 것입니다.

 

"당신은 이미지가 아니라 존재였어요."

 

그들의 사랑은 그림 속에, 기억 속에, 그리고 서로의 영혼 속에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처럼 남습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단순한 시대극 멜로 영화가 아닙니다. 이는 여성의 시선으로 본 사랑, 예술, 그리고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입니다. 서로를 바라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발견하는 자아와 해방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죠. 영화를 보고 나면 한동안 엘로이즈의 얼굴, 그녀의 푸른색 드레스, 해변가의 모습,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강렬한 감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영화는 '보는' 경험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며, 사랑하는 사람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복잡하며 아름다운 행위인지를 일깨워줍니다.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으셨다면, 부디 꼭 경험해 보시기를 강력히 추천합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 영화 정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Portrait of a Lady on Fire (2019)

개봉: 2020-01-16

등급: 15세 이상관람가

시간: 120분

장르: 드라마

감독: 셀린 시아마

출연: 아델 에넬 (엘로이즈), 노에미 메를랑 (마리안느), 발레리아 골리노 (백작 부인)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메인 예고편

반응형
반응형